안수연의 사진과 수행

윤경희 (문학비평가)

일반 감상자로서 우리가 미술을 가까이 체험하는 방식 중 하나는 전시장을 방문해서 그곳에 설치된 작품을 둘러보는 것이다. 한 장소를 점유한 작품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작가가 특정 재료, 매체, 형식에 자신의 사유와 감정, 표현 의도, 노고, 기술 등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미련 없이 전부 쏟아부어 응축했기에,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독자적인, 완결된,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작품은 어느 장소에 설치되든 작가가 그것에 부여한 최종의 닫힌 형태를 변함없이 유지하며, 우리는 작가의 실존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작품 자체를 존중하며 감상한다.

이와 달리, 결과물보다는 창작 방법과 과정에서 더 중요한 예술적 형식과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작가가 있다. 그에게 작업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그는 관객 없는 행위예술을 작업과 노동의 이름으로 수행하며, 많은 경우 그것은 그의 일상생활과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재료와 형식은 창작 행위의 결과물인 작품에 귀속될 수 있는 반면, 방법과 과정은 창작 행위자로서의 작가에게서 온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그의 예술적 방법과 과정은 그 자신 및 그의 삶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와 그의 삶은 어떤 물질적 형식과 매체로든 사물 안에 결코 온전하게 담을 수 없는 잉여적이고 잔여적인 요소로 남는다. 결과적으로, 그가 전시장에 최종적으로 가져다 놓는 것은 반드시 바로 그 매체, 바로 그 형태, 바로 그것이어야 할 당위성 없는, 그저 무엇이어도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완성작의 외양을 갖추었든, 작업 일지를 끄적인 종잇장이든, 작업 도구 한 점이든, 설치되는 사물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변할 것이며, 어느 전시도 최종의 완결이 아닐 것이다. 가장 본질적인 예술은 전시장 밖 그의 삶의 수행이며,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한 계속 가변할 것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전시장에 가더라도 놓치게 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예술적 체험의 요체가 눈앞에 놓인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창작한 방법과 과정 및 그것을 지지하는 작가의 삶 있다면, 우리는 운 좋게도 동시대인인 그와 일정 시간 삶을 함께하지 않는 이상 그의 예술을 나누어 향유할 수 없지 않은가. 오늘날 예술적 체험의 요체는 후자처럼 작품에서 작업으로, 사물에서 행위로, 이행하고 있다. 이때 지역문화예술재단의 예술가 레지던시는 창작자와 감상자가 동시대인으로 만나 창작과 삶을 교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는 일상의 퍼포먼스에 기반한 자신의 예술을 지역 주민을 포함한 감상자들에게 열어 보이고, 우리는 그가 초대하는 작업실과 프로그램에서 예술의 공동 행위자로 참여한다. 전시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개방, 초대, 교류, 공동의 학습이며, 작품 완성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만남과 엮임의 시간이다.

위에서 범박하게 구분한 두 가지 유형의 예술 중 안수연과 그의 작업은 단연코 후자에 속한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산하 예술곶산양의 2025년도 입주작가 안수연은 당해 8월 나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우리는 미지인으로 만나 나흘 동안 서로의 삶을 개방했고, 곶자왈과 순비기나무 관련 작업 과정에 창작자와 감상자로서 동행했다. 안수연은 사진작가라 불린다. 이는 안수연의 작업 매체와 방법이 대체로 사진술에 기반하며 그 결과물은 사진으로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타당한 명칭이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자로서 나에게 그의 작업은 앞서 말했듯 관객 없는 행위예술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된다.

안수연은 수년 전 〈식물원 지도〉 전시에서 뉴욕 브루클린 식물원의 이주 식물과 뉴욕 거주 이주자를 매치한 사진 연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본인의 대륙간 이주, 특정 장소의 반복적인 방문,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및 대화가 선행한다. 생활 환경을 분연히 바꾸기, 피사체가 실존하는 장소를 집요하게 찾아가기, 만나서 묻기와 듣기에는 낯섦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내던지며 뒤섞겠다는 충동적 의지가 작용한다.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떨어져나온 덕에 삶에 찰과상과 관통상을 입을지라도.

이후 안수연은 제주 이주를 감행하고, 외래 식물을 수집 전시한 인공 낙원이 아니라 자생 식물이 수만 년 넘게 얽혀 이룬 곶자왈에 매혹된다. 낯선 곳으로 떠나기, 기꺼이 사로잡히기, 상흔의 역사를 들여다보기, 이러한 일련의 수행이 뉴욕에서뿐만 아니라 제주에서도 안수연의 퍼포먼스를 구성한다. 태고의 자연사와 국가 폭력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그리고 현재는 파괴적 개발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숲의 가시넝쿨과 어둠 속으로 안수연은 거듭 들어간다. 곶자왈에 들어가고, 머무르고, 일정 시간과 체력을 바치고, 이미지와 식물 잔해 몇 점을 겸손하게 취하고, 조심스럽게 통과해 나오고, 다음날 이를 반복한다. 안수연의 작업실 벽에 걸린 곶자왈 사진 연작은 그의 곶자왈 통과 퍼포먼스가 지속되는 한 완결되지 않을 것이다.

안수연이 곶자왈을 대하는 태도에는 경건함이 서려 있고, 따라서 그의 곶자왈 통과는 제의적 면모를 띤다. 곶자왈은 탈인간적인 신성한 삶과 인간 공동체의 비극적 죽음을 동시에 품은 장소이므로, 안수연의 곶자왈 통과 퍼포먼스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애도하면서 또한 삶의 지속가능성을 탐색하고 수호하는 윤리적 함의를 갖는다. 이 퍼포먼스는 평가하거나 감시하는 타인의 초자아적 시선 없이도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라는 점에서, 더욱 윤리적이다.

제주 이주자로서 안수연의 관심은 곶자왈에서 순비기나무로 확장하고 있다. 순비기나무는 제주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자갈과 모래가 많은 토양에서 질기게 생존할 수 있게 포복성 줄기와 뿌리가 발달되었고, 잎과 열매의 독특한 향은 해녀들의 두통과 관절염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안수연의 새로운 퍼포먼스는 순비기나무가 군락을 이룬 장소를 찾아다니는 데서 시작한다. 곶자왈 사진을 어떤 장소에 어떻게 설치하느냐의 문제보다 곶자왈을 찾아가는 행위 자체에 안수연의 예술적 작업의 본질이 있듯, 안수연이 순비기나무에서 내보일 가시적 결과물보다는 그가 현재 순비기나무를 찾아 폭염과 강풍 속에 헤맨다는 행위에 더 주목하고 싶다. 나는 곶자왈과 순비기나무를 만나러 가는 안수연의 행위예술에 동참했다. 동시대 예술의 현장성과 지역문화예술재단의 공공성 덕분에 가능한 아름다운 체험이었다.